우연히 아래와 같은 기사를 봤는데...
한 대기업 회사에서 연말 이벤트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봉투에 담아 현금으로 지급했다는 얘긴데요.
순간 오래전에 제가 월급 받으면서 기분 나빴던 경험이 확 떠오르더군요.
월급봉투의 추억...돈 세는데만 5시간 걸려
http://www.asiae.co.kr/news/view.htm?sec=it1&idxno=2010123009570716967
2002년이던가... 새로 만드는 벤처 회사에 대표를 맡을 예정으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회사의 오너는 서울 도심 요소요소에 큼직한 오피스 빌딩만 여러 개 가지고 있고 골프 연습장도 몇개 가지고 있는, 젊은 준 재벌이었습니다.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저보다 기껏해야 다섯살쯤 위?), 듣기로는 부동산 재벌인 아버지로부터 일부를 선상속 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 오너가 굴리는 자기 재산이 적어도 천억 정도는 넘는 듯 싶었습니다.
그 회사가 있던 빌딩도 그 오너의 소유였고, 이미 여러 법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뒤늦게 IT 벤처를 하나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당시에는 IT 벤처 하나쯤은 차리는 게 돈 좀 가진 사람으로 행세하는 카드들 중 하나였습니다) 회사를 하나 만들었는데, IT에 문외한이다보니 지인을 통해 대표로 앉힐 전문가를 섭외한 것이 저였습니다.
뭐 아직 대표 명함을 가진 건 아니고 실장이라고 명함을 파주고는, 뭔가 히트할 만한 아이템을 찾아내라고, 그러면 필요한 돈은 몇억이든 몇십억이든 넣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텅텅 빈 사무실에 앉아 사무 보조 격의 젊은 직원 한명을 데리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오너와 함께 한 6개월? 같이 지내다보니 술 먹을 때나 뭘 살 때나 돈 깨나 가진 사람들이 돈 쓰는 방법을 제대로 봤습니다. 다른 세상이더군요. 헐...
그런데...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 한달에 한번씩은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듣기에는 황당하겠지만 월급을 받을 때였습니다. 이 오너가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혹은 개념이 달라서일 수도?) 월급 주는 걸 매번 빼먹더군요. 그 빌딩의 꼭대기 층에 빌딩들을 관리하는 자기 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는 경리 직원들이 알아서 했지만, 저는 별도 법인에 있고 경리 직원이 있는 건 아니어서 월급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매번 월급 주는 걸 까먹고 지나갔죠.
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월급 달라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면 아 입금해줄께요 이런 식이 아니라.. "아 그래요?" 하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들을 꺼내 착착 세어줍니다. 양복주머니나 지갑에 빈 봉투를 넣고 다닐리는 없으니까, 그냥 수표만 착착 세어서 제 손에 건네주고는 사라집니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단 한번도 수표가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갑에 항상 몇백만원 정도는 넣고 다니는 거였죠. 100만원짜리 수표로 받을 때도 있었고 50만원짜리로 받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10만원짜리로 수십장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카드를 안쓰려고 현금을 두둑히 갖고 다니는 걸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술먹고 나면 카드로 내니까요.
월급을 받을 때마다 달라고 해야 하는데다가, 지갑에 갖고 다니던 돈에서 꺼내 봉투 하나 없이 손에 쥐어주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저는 그보다 굴욕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오너 자신이 인격이 문제가 있거나 했던 건 아니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런 행위가 타인에게 굴욕감을 줄 수 있다는 자체를 떠올릴 수 있는 인생 경험이 부족했던 것 뿐입니다. 게다가 뭔가 꿈을 가지고 회사를 만든 것도 아니고, 일단 회사를 만들어놓고 좋다 나쁘다 평가할 눈도 없으면서 일단 비젼만 내놓으면 무조건 돈을 집어넣겠다, 이런 식이구요.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신물이 나더군요.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분들께는 좋은 기회다 싶겠지만, 저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돈에 대한 스케일과 개념이 저와 완전히 다르다보니, 예를 들어 한 10억쯤 부은 후에 연 수익 5억쯤 내는 대박 사업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심드렁할 게 눈에 훤했구요. 저라는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눈도 없으니 회사를 크게 키워 큰 공을 세웠더라도 언제 밀려날 지도 모르는 거죠. 자신을 알아줄 수 없는 사람과는 상하 관계로 밀접하게 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그 회사에 다녔던 경험 자체를 잊고 살았는데, 좀전의 그 기사 덕분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습니다. 짭.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오너가 나쁜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고 성격도 좋았는데,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언제나 호의만으로 충분한 건 아니니까요.
살면서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와서는 필요한 만큼의 돈은 갖고 있습니다. 완전한 무일푼으로 결혼하면서 얻었던 빚, 집 사면서 얻었던 빚도 몇 년 전에 다 갚았고(대출 제로! ㅎㅎ), 집사람의 계산에 따르면 누적 자산도 꽤 됩니다. 수백, 수천억 자산으로 펑펑 써대며 살지는 못해도, 지금까지 돈이 부족해서 하고 싶은 뭔가를 하지 못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돈 욕심이 별로 많지 않다 보니 큰 돈을 벌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지금 꽤 살만한 것도 돈 욕심을 많이 내지 않아서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시 돈은 사람을 얻게도, 잃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인심 좋게 돈을 주면서도 인심을 잃는 일은 정말 최악이겠지요.
결론 : 비자금생겼다.